5. 인터스텔라와 현대 물리학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3. 12. 오후 10:09   [ 2015. 3. 12. 오후 11:52에 업데이트됨 ]

 
5. 인터스텔라와 현대 물리학





 김숙경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특임교수)





인터스텔라에는 잘 알려져있는 현대 물리학 이론들이 몇 가지 등장한다.


먼저 상대성 이론,

그 중에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원리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쿠퍼와 딸 머핀의 만남이다. 빛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했던 아버지 쿠퍼가 지구에 남아 있던 딸 머피와 대체 공간에서 만났을 때.. 딸은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바로 아이슈타인의 쌍둥이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여러분들도 늙고 싶지 않다면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명장명 역시 특수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내용인데, 쿠퍼와 아멜리아가 우주선을 타고 대체행성 탐사를 나간 사이, 빛의 속도로 일주일간의 탐사를 보내고 모선에 돌아왔을 때 홀로 남겨졌던 흑인 연구원이 나이를 훌쩍 먹어 청년에서 중년이 되어있던 장면이다. 쿠퍼일행이 빛의 속도로 우주여행을 한 일주일 뒤가 한 곳에 머물러있던 흑인 연구원에게는 29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쿠퍼 일행이 돌아와 꺼내줄 때까지 캡슐 속에서 잠들어 있었으면 나이를 먹지 않았을텐데, 그 연구원이 선택한 것은 29년 동안 좁은 우주선에 앉아서 홀로 지구를 구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실로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진정한 고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웜홀(worm hole - 웜홀은 벌레가 사과의 표면을 돌아가서 반대편에 닿는 것이 아닌 사과 속을 파고들어가는 모습에서 따옴) 망해가는 지구를 대신 할 공간을 찾아 떠나는 쿠퍼 일행은 행성간의 최단 거리를 형성하는 우주의 지금길 - 웜홀을 통과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이론의 백미는 블랙홀 이론에 있다. 블랙홀은 중력이 무한대에 이르므로 주변의 모든 물체를 빨아들인다.


그러나 회전운동하는 '커 블랙홀'은 주변을 지나는 물체가 이분되어 하나가 블랙홀 안으로 들어갈 경우 남은 반쪽은 회전하는 운동력으로부터 막대한 에너지를 얻어 탈출할 수 있다. (펜로즈 이론)


쿠퍼는 우주선의 연료가 부족해지자 바로 이와 같은 블랙홀 이론을 적용해 우주선을 분리시키고 자신은 블랙홀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블랙홀 에너지의 힘으로 아멜리아를 지구 대체행성(이름이 생각안남)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리고 블랙홀로 빨려들어 간 쿠퍼는 죽지 않고 5차원 공간으로 인도되어 딸 머피와 차원을 넘어선 조우(?)를 하게 된다.
(오늘날의 과학이론에 의하면 실제로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체는 중력에 의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고 한다.)


5차원 공간에 도달한 쿠퍼는 시공간이 뒤죽박죽된 카오스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블랙홀에 떨어졌던 로봇이 알아낸 방정식 정보를 딸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여의치 않다.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더한 것이 4차원 시공간이다. 힘의 4종류 중에서 전자기력과 강한핵력, 약한 핵력은 모두 4차원을 넘지 못한다.


4차원의 그물을 통과 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중력뿐이다. 그래서 쿠퍼는 중력을 이용해서 딸 머피에게 방정식을 전달한다.


그것은 중계기지를 들어 올려 지구인류를 대체공간으로 옮겨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고 머피는 그렇게 인류를 구한다.
그렇다. 희망의 열쇠는 중력이 가지고 있었다.


gravity!!


그리고 5차원을 통과해서 느껴지고 관찰되는 유일한 또 하나,,,, 그것은 사랑!

하여, 쿠퍼는 아멜리아가 있는 행성으로 떠난다.


( 이상은 영화의 기억을 더듬어 쓴 것이어서 명칭이나, 내용상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4. 고난의 시대, 희망의 사유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2. 12. 오후 11:36   [ 2015. 3. 12. 오후 10:22에 업데이트됨 ]

 
4. 고난의 시대, 희망의 사유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



이규성의 이 역작은 부제(‘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가 말해 주듯이 세계가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한국의 철학자들이 절실하게 모색했던 자유의 이념을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문턱에서 서구를 지배한 것은 한편으로는 허무주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의 맹신이었다. 이 점에서 현대의 출발점에는 모순이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제국주의의 흐름으로 나타났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매개한) 이 흐름을 통해 ‘세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이런 상황을 “세계의 불안”으로 파악한바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현대 한국 철학의 기본 이념이 탄생했고, 저자는 이를 곧 상실된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의 이념’이라고 간파한다. ‘해방의 이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유 구도에 입각해 저자는 저작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주로 일제시대의 사상들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동학과 대종교를 포함해 주로 종교적 성격을 띤 사상들이 논의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한국 근대 철학사상에서 아마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변증법적 사상들이 다루어진다. 박종홍, 함석헌, 신남철, 박치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현실과 전망’이라는 제목 하에서 현대 한국 철학의 현실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이 저작은 구한말 이래 전개되어 온 한국 철학에 대한 ‘회고와 전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저작이 띠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 중 하나는 현대 한국에서 전개된 철학사상들을 그 역사적 맥락에 위치 짓고서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 구성에 의한 사유가 아니라 역사적 서술에 입각한 사유이다. 그 중 기초적인 것은 구한말의 철학적 상황, 즉 이전의 전통 철학(특히 성리학)도 또 서세동점의 세력과 함께 밀려 온 서양 철학도 이 시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되기는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조건과 정세 때문에 이 시대의 창조적인 철학들은 대개 성리학적 교양을 갖추었고 서양 사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받았으나 태생도 사상도 거기에 머물기보다 새로운 사유로 나아간 인물들에 의해서, 그리고 엄정한 철학적 분석보다는 삶의 고뇌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 몰두한 인물들에 의해서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 철학의 사유 틀이 기본적으로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처했던 문제는 민족이 처한 이런 고뇌의 시대를 맞이해 어떻게 희망의 사유를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이었기에 당대(특히 일제시대)의 사유들은 대개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사상보다는 오히려 종교사상의 성격을 많이 띠곤 했다. 그 중에서도 동학은 민족이 처한 한계상황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 현실을 넘어선 무한자(無限者),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사유함으로써, 현실의 고뇌에 힘겨워하는 민족에게 정신적 희망을 주고 도래할 시대를 위한 사상적 준비를 하도록 했다. 최제우, 최시형의 이런 비전은 특히 이돈화(李敦化)에 의해 철학적으로 개념화되었으며, 김기전(金起瀍)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동학사상을 근대적인 형태로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자는 이렇게 동학을 한국 현대 철학의 시발점에 위치지우고 있다.

현실의 고뇌가 깊어지고 그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의 마련이 거의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과 무한자를 직접 이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인간의 내면은 객관세계(자연과 역사)보다도 더 넓은 광활한 진리의 장소가 되고, 객관세계의 규정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생기한다. 이는 곧 철학적 ‘개벽(開闢)’의 경지이다. 저자는 이런 경지가 동학이 추구했던 자유의 경지로 본다. 이런 경지가 확보될 때 불가능할 것 같았던 현실 타파의 길도 조금씩 열리게 되며, 이때 객관세계에서의 실천에의 길도 열리게 된다. 그리고 이 실천의 지향점은 곧 ‘광복(光復)’이었다.

대종교(大倧敎) 또한 ‘입헌공화제’라는 객관적 현실의 추구가 좌절되자 내면의 자각(‘한얼’에의 깨달음)과 미래에의 사유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동학과 궤를 같이 한다. 이기(李沂), 나철(羅喆), 김교헌(金敎獻), 서일(徐一) 등은 대종교의 뜻을 함께 하면서, 동학과 마찬가지로 내면에 대한 생기론적 깨달음(‘깊이의 심성철학’)을 추구하는 한편 교육과 독립운동을 통한 객관세계의 변형(‘희망의 역사철학’)을 추구했다. 이 역시 상실된 세계에서의 자유이념의 추구를 잘 보여준다. 당대의 이런 노력들은 무정부주의를 포함해 다른 여러 가지 형태들로 전개되었으며, 신채호(申采浩), 이회영(李會榮), 이건창(李建昌), 박은식(朴殷植)을 포함한 많은 인물들을 포함한다.

1926년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이 설치되면서 한국 현대 철학의 성격을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 시대 이후 한국 철학자들은 일본 철학자들을 통해서 서양 철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며, 따라서 사유의 구도나 전개 방식, 어휘, 스타일 등등이 전면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종래의 종교적 사유들(또는 ‘재야 철학들’)과 이후의 철학적 사유들(경성제대의 철학적 훈련을 거친 본격적인 철학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에 만들어지게 된다. 만일 저자처럼 현대 한국 철학의 출발점을 동학으로 잡을 경우, 이 상황은 곧 동학과 현대 철학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간극은 지금까지도 메워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1926년은 한국 현대 철학의 또 하나의 핵심적인 분기점이 된다.

박종홍(朴鍾鴻, 1903~1976)),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신남철(申南澈, 1907~1958), 박치우(朴致祐, 1909~1949)는 이 시대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이들 사유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한국 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사유문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증법은 플라톤이 제논의 역리를 ‘dialegesthai’(문답법)를 통해 극복 · 승화한 이래 서구 철학의 중요한 한 갈래를 이루어 왔으나, 현대 한국 철학자들의 변증법은 특히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가 각 사상의 성격을 상당 부분 좌우했다고 할 수 있다. 박종홍, 함석헌이 헤겔적 변증법을 추구했다면, 박치우, 신남철은 마르크스적 변증법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철학자들의 사유가 변증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는 없으며, 변증법은 이들의 공통 사유문법일 뿐 그들의 고유한 개별성과 구체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박종홍은 민족의 신민지화와 해방, 그리고 근대사회 건설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창조의 논리’를 다듬게 된다. 그는 헤겔 변증법에 입각해, 당대의 부정적 상황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창조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박종홍이 헤겔 변증법에 주안을 두고 마르크스 변증법을 물리친 것은 후자가 근대적 주체를 개념화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하이데거를 매개하는 향내적 사유를 향외적 사유와 더불어 한 축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정향은 그로 하여금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는 등 박정희 정부와 밀착하게 만들었고, 노동자들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기업인들을 위한 철학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함석헌은 헤겔적 사유를 기독교사상의 맥락에서 전개한다. 함석헌은 시련이란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부여하는 시험이라는 『구약』의 역사형이상학을 일반화해, 그것을 헤겔적 목적론의 방식으로 전개했다. 이런 구도에 입각해 그는 역사를 자유를 향한 진보 과정으로 보는 헤겔적 역사철학을 물질의 타성을 극복하고 자유를 찾아가는 생명이라는 생명철학으로 전개했다. 이 생명이 근원이 모두에게 존재하는 ‘씨알’이며(이는 성리학의 성 개념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씨알에의 깨달음을 통해 현실의 극복을 꾀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일제시대 종교사상들과 사유의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이전의 종교철학들이 그랬듯이, 그의 사유 역시 내면의 깨달음과 유토피아를 매개 없이(객관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와 변형이 없이)이 이어버림으로써 사실상 현실세계에서 탈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남철과 박치우는 이들과 달리 마르크시즘에 입각해 보다 구체적인 사회 변혁을 꾀했다. 이전의 종교적 철학자들이 설파했던 한울, 한얼, 씨알 등등의 개념들은 이들에 와서는 인문정신, 주체성, 또는 베르그송적 뉘앙스에서의 생명약동 등등의 보다 근대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로 전환된다. 아울러 다분히 사변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예전의 실천정신은 좀더 구체적인 정치경제학적 사유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는 곧 이전의 사상들에서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못한, 그러나 근대적 삶에 있어 가장 먼저 분석되어야 할 개념들 중 하나라 할 자본주의가 이들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나아가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 비판보다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흐름에 영합했던 박종홍과 달리, 이들에게서 비로소 당대 현실의 핵심 모순이 개념화될 수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저자는 3부에서는 오늘날의 철학을 진단하고 미래 철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동북아 철학의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무/무극으로부터 전개되는 “창조적 생기의 유희적 전개”이다. 따라서 서구 철학에서와는 달리 무 개념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모든 유를 보듬어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며, 또한 모든 유가 그곳에서 나와 그곳으로 돌아가는 궁극의 터이다. 한국의 철학은 이런 전통 위에 서서 인문적 가치들이 통용되는 문화 창조를 이루어 갈 수 있으며, 민주경제와 민주정치라는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저자는 선철들의 사유를 이어받아 한편으로는 ‘내적 성실성’이 사유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충실성’이 실천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 저작은 오늘날의 한국 철학이 낳은 걸작이며, 저자의 문제의식과 역량이 잘 녹아들어간 역작이다. 그러나 두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현대 한국 철학은 일본 철학과의 연계성을 떠나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에게 현대 철학이란 서구 철학의 영향을 떠나서는 설명하기 힘든 사유라 할 수 있고, 이 서구 철학은 일본 철학을 매개해서 우리 사유 속에 내장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적 어휘 거의 전부가 일본 철학계에 의해서 번역된 것이며, 따라서 그 번역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현대철학사론』은 서구 철학과 한국 철학과의 연계성은 잘 설명하고 있으나, 일본 철학과의 연계성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오히려 중국 철학과의 연계성은 간간히 다루어지고 있다) 앞으로 한국 근대 철학에 관한 논의에서는 서구, 일본, 한국의 삼자 관계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저작은 오늘날 한국에서 산출되고 있는 거의 모든 저작들에게 해당되는 특징을 역시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1부에서는 주로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종교적 철학들을, 2부에서는 일제시대로부터 근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박종홍, 함석헌, 신남철, 박치우의 철학사상들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3부에서 이제 저자가 이 네 사람 이후에 전개된 한국 철학사상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대목에서는 한국 철학자들은 거의 거론되지 않고 거의 외국 철학자들만이 참조되고 있다. 한국 철학자들에게는 동시대 철학자들과의 대화와 대결을 통한 사유 전개라는 것이 아직은 매우 낯선 무엇인 것 같다. 과거에 대한 역사적 논의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을 뿐 바로 현재의 사유에 대한 눈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 철학도 뒤나 앞만을 바라보기보다 바로 옆을 바라보면서 사유하는 풍토로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가 모두 앞과 뒤만 바라보면서 평행을 달리기보다는, 옆으로 기울어지는 ‘클리나멘’의 운동을 통해서 카오스모스의 운동을 일으키는 그런 사유가 지향되어야 하지 않을까.


3. 알렉산더론 - 욕망이라는 이름의 戰車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26. 오후 10:25   [ 2014. 2. 6. 오전 1:47에 업데이트됨 ]

 
알렉산더론 - 욕망이라는 이름의 戰車 





 김숙경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특임교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무력해진 그리스 세계를 정복한 것은 당시 그리스 북방에 위치해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마케도니아인은 단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변방의 야만족에 불과한 민족이었습니다만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 왕이 지휘하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 그리스 영토를 수중에 넣고 맙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필리포스 왕은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리스의 패권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당시 약관의 청년이었던 알렉산더는 대단한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해되자 발 빠르게 움직여 암살자는 물론 왕위를 둘러싼 모든 경쟁자들과 그 측근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기선제압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 전역의 소규모 반란들을 진압하여 정세를 안정시킨 뒤 세계 재패를 위한 대장정 길에 오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오랜 숙적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다시 동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일 강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지도상으로 보면 알렉산더가 차지한 영토는 그리스에서 중동, 중앙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일부에 불과한 지역입니다만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상으로 본다면 서유럽과 인도 본토를 제외한 세계 전역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세계 재패의 꿈이 거의 실현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세계 재패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케도니아 고유의 장창(長創) 밀집부대의 위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장창밀집부대란 말 그대로 긴 창을 가진 병사(보병)들이 밀집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보통 창의 두 배 길이(5.5m)가 되는 창을 두 손에 잡은 병사들이 빽빽하게 방진(方 진)을 이루고 대적시 수직으로 세워들었던 장창을 수평으로 겨누면서 적군의 근접을 막습니다. 이 전법은 특히 기마부대의 대적에 효력을 발휘하여 돌진하던 말들이 갑자기 수평으로 달려드는 장창에 놀라 좌충우돌하며 전열을 어지럽히는 사이 다른 부대들은 측면 공격을 가해 당황한 적군을 포위하는 전법을 구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예의 장창부대를 거느린 알렉산더의 군대는 가히 천하무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승전고를 높이 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정길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던 ‘승리의 전차’는 인더스 강 가에 이르러 그만 우뚝 멈추고 마는데 기나긴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알렉산더의 병사들이 가공할 인도의 코끼리 군단을 맞아 세계 재패의 마지막 관문인 인도 정벌을 코 앞에 둔 채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빠른 전투용 코끼리들 앞에서는 장창부대의 위력도 소용없이 낙엽처럼 던져지고 짓밟히며 쓰러져갔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온 몸을 던져 싸우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알렉산더는 분퇴하여 페르시아의 바빌론에 입성한 뒤 그 역시 의문의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 마케도니아를 떠난지 1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크게 엇갈립니다.
세계화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은 희대의 영웅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이자 동서 문명의 교류자라는 호평과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숙적들, 심지어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까지 살해하고 정복지의 주민들을 무수히 학살했던 무자비한 권력자라는 악평등, 극단적인 해석과 평판이 난무합니다. 더욱이 그의 행적을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더해져 그 편차의 증폭을 더해주고 있는데 그 복잡한 역사의 미궁 속을 잠깐 들여다보자면 이렇습니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그리스 북서부의 작은 왕국 몰로디아의 왕녀 올림피아스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필리포스의 선조는 그리스 신화 속의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였다고 하며 올림피아스 역시 트로이의 장사 아킬레우스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역사의 시작은 신화에서 비롯되니 그 진위여부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일이 되겠지요.
제우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는 밀의종교(密敎)의 신봉자로 자신이 제우스신과 교접하여 알렉산더를 낳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정도로 신비적인 색채가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라나는 알렉산더에게 늘 그가 제우스의 아들임을 주지시켰으며 알렉산더 역시 훗날 그의 어머니처럼 밀교에 심취되어 자신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신과 같은 존재로써 백성들로부터 추앙받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를 신으로 섬기는 행위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태생부터가 수수께끼에 싸여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필리포스왕이 그를 경호하던 근위대원에게 암살당하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보낸 첩자의 소행이라는 설과 한 때 필리포스의 동성애인이었다가 버림받은 경호원의 단독 범행이라는 다분히 정략적인 설들 이외에도 항간에는 왕비 올림피아스의 사주설(使嗾說)이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그만큼 올림피아스는 권력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다른 왕비가 낳은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 저능아로 만든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편 필리포스가 죽자 당시 알렉산더의 가장 큰 경쟁자로 떠올랐던 후비의 어린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후비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훗날 알렉산더가 요절하자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다가 그녀 역시 반대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올림피아스의 사주설에 가장 많은 표를 던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녀로서는 왕이 총애하던 후비의 아들이 성장하기 전에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왕위에 올려놓아야만 안심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설득력 있게 작용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부왕 암살의 주범이거나 적어도 공모자라는 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요?
근년에 만들어진 올리버 스톤의 영화 ‘알렉산더’를 보면 그가 부왕의 암살범이 아님을 확실히 드러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알렉산더가 안고 있는 내면의 고독과 외로움 등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연민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적 접근을 통해 부모에 대한 애증을 한 몸에 안은 채 끝없이 갈등하고 방황하고 고독해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알렉산더의 내면 심리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이와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냉혹하고 비정한 면모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왕 암살과 관련된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기록이 있어 알렉산더의 직접 개입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일면이 있습니다. 그 혐의점을 살펴보자면 우선 부왕이 총애하던 후비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서 알렉산더의 왕위 계승이 불안해졌다는 것, 그 당시 부왕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 왕이 살해되자 그것을 구실 삼아 왕위 경쟁자들과 자신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혐의점은 암살범을 체포하여 심문하거나 재판에 부쳐 범죄의 실체를 밝히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부왕 암살설을 지지하는 측은 이와같은 알렉산더의 행위를 증거인멸을 위한 방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 올리버 스톤은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사주임을 눈치 챈 알렉산더가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서 암살범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만 .....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이처럼 사건의 전모는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하긴 화성 연쇄 살인범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판국인데 2천3백 년 전의 살인사건을 오늘날의 인간들이 무슨 수로 밝혀내겠습니까마는.....
이런 경우 떠오르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독일의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두고 말 할 수 있는 부분만을 언급하는 편이 훨씬 실속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우리가 여기서 건질 수 있는 소득은 암살의 주범이 누구였던 간에 부왕의 암살 사건은 알렉산더에게 백퍼센트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렉산더는 확실히 왕권을 거머쥘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나의 의문점을 애써 잠재우고 나니 또 하나의 의문점이 불쑥 고개를 쳐듭니다. 왜? 알렉산더는 그토록 세계 정복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그토록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Why?
단순히 전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싶은 그의 야망 때문이었을까?
그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그로 하여금 끝없이 싸우고 또 싸우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어떤 모습을 혹은 어떤 상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간절히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집요하게 따라붙었을, 그림자 같은 그 무엇 때문에 어디엔가 광적으로 집착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패배 혹은 배신에 대한 두려움?
암살과 죽음에 대한 공포?
아니면 모종의 죄의식?
그도저도 아니면 보다 원초적인 오이디푸스적 외로움? 혹자는 그를 심각한 전쟁 중독증 환자로 진단하기도 합니다. 전쟁도 도박이나 마약이나 그밖에 여타 쾌락 추구의 행위들처럼 중독성이 있다는 것인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장기나 바둑에 심취하듯이 아니면 컴퓨터 게임 ‘바람의 나라’에 빠져들 듯이 그는 실전 게임에 흠뻑 빠져들어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투에 임하면 늘 선봉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움에 몰두했다는 기록은 이 같은 전쟁 중독설에 한 층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그의 원정에는 동서융합을 이루려는 보다 원대한 계획이 깔려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동서 문화의 융합을 꾀했다는 것은 사료 상으로도 명백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는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 식 도시를 건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 뜬 ‘알렉산드리아’ 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집트의 수도처럼 오늘날까지도 그 명칭이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의 바빌론 성에 머물며 그 곳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 곳의 제도와 복식 등 동방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처럼 이민족들을 바바리안으로 치부하여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가 페르시아의 왕을 자처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최상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민주주의 보다 동방의 전제 군주제라는 시스템이 간절히 요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한없이 격하되어 토인비가 칭송해마지않던 드높은 이상이나 고귀한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다못해 올리버 스톤의 오이디푸스적 연민마저 허용되지 않는 단테의 지옥에나 떨어질 (실제로 단테는 신곡의 지옥 편에 알렉산더를 배치합니다) 파렴치한 전쟁광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겠지요.
늘 그렇듯이 모든 역사에는 구멍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무수한 추측과 해석과 나아가 픽션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역사 학자 E.H 카아는 ‘역사란 사실을 근거로 쓰는 소설이다.’ 라고 말했을까요.
여기에 보잘 것 없는 제 의견이 보태져 또 하나의 허접스러운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저의 관심사는 방향을 크게 틀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이후 전개 될 동서 문화의 융합과 그에 따른 예술의 변천사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전개될 헬레니즘 예술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내내 웬지 무겁고 착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난 뒤의 홀가분함.....
역사의 늪에 그물을 던지면 온갖 질퍽한 것들이 한데 뒤엉킨 채 끌려 올라옵니다.
그 묵직하고 지저분한 그물을 맑은 물에 담구고 흔들어 주면 정치, 권력, 욕망, 전쟁, 음모, 저항, 반역, 처벌, 혁명, 투쟁..... 이 모든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들이 다 씻겨내려가버리고 마침내 남는 것이 있습니다. 사금처럼 가볍고 빛나고 아름다운 것..... 바로 예술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그야말로 죽기까지 달리는 알렉산더의 戰車와 닮은 또 하나의 전차를 문득문득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습니다.
'멈추면 죽는다. 쉬지 말고 달려라.' 바로 욕망의 레일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電車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시대로부터 이 광란의 열차를 이야기하기까지 인류가 가야할 길은 멀고도 멉니다.


2. 낯 선 만남 깊은 공감 - 경의선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2. 30. 오후 8:30   [ 2014. 1. 26. 오후 10:29에 업데이트됨 ]

 
낯 선 만남 깊은 공감 - 경의선




 김숙경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특임교수)





우연히, 그리고 별반 기대 없이 보게 된 영화 ‘경의선’의 내용은 결코 복잡하지 않았다.

사랑의 배신에 상처받고 망연자실한 대학 강사 한 여자와, 철로에 뛰어든 사람을 치고 넋이 반 쯤 나간 기관사 한 남자가 무작정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고, 마지막 정거장에서 몰리듯 내린 곳은 남한의 최북단 임진강역! 

폭설로 모든 교통편은 두절 되고, 되돌아 갈 하행선조차 끊긴 늦은 밤, 외딴 역사에 그렇게 모르는 두 남녀가 대책 없이 남겨졌다. 

처음에는 낯 선 공간만큼이나 서로가 한없이 낯설어 촉수를 곤두세우던 두 남녀는 어느덧 한 마디 두 마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고, 마침내 더운 눈물과 순결한 포옹으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여자가 우연히 올라탄 전철에서 귀에 익은 남자 기관사의 멘트를 듣게 되는 영화의 라스트 신은 담담하지만 자못 강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다가올 새 해를 몇 시간 앞두고 나는 영화 경의선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다. 내가 그 영화를 본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다. 그러고 보면 두 남녀가 역사 벤치에 앉아있는 포스터부터가 웬지 시시해서 별 기대 없이 보았고, 내용도 단순하고 밋밋해서 금방 잊혀지려니 했는데 지금까지 기억 속에 있는걸 보면 은근 괜찮은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와 상관없이 영화 속에서 어떤 느낌이나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영화 경의선에서 읽은 메시지를 반추해보자면 이렇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겠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공통의 상처 하나가 있다. 그게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강자건 약자건 학자건 고자건 영자건 숙자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통의 상처, 바로 ‘분단’이라는 상처다. 영화 속 생면부지의 남과 여가 서로의 상처를 깊이 공감하며 진심어린 포옹을 나누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재회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남과 여가 한 열차에 몸을 싣고 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의 남과 북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당연히, 하나가 되었으면 ...


 

1. 역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2. 9. 오후 8:36   [ 2014. 1. 26. 오후 10:28에 업데이트됨 ]

 
역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김숙경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특임교수)



하나 - 그리핀(Griffin)

그리핀은 독수리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등에는 날개가 달린 전설 속의 동물이다.

이 전설의 동물은 ‘황금의 수호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동물이 본능적으로 황금이 매장되어 있는 곳을 알아내고, 황금을 발견하면 그것

으로 집을 짓되, 약탈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파른 절벽 중턱에 짓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고대인들은 금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서

황금을 숭앙하고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길 좋아했는데, 그것은 금의 재질이 영구불멸한데다가 금의 광채는 암흑과 불안을 몰

아내는 광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원한 삶을 동경한 고대인들은 황금의 수호자 그리핀이 새겨진 장신구와 무기류를 부적처럼 몸에 

지녔던 것이다. 특히 유목민족의 시조격인 스키타이인들은 그리핀을 그들만의 독특한 ‘스키타이 동물문양’으로 고안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황금의 수호자 그리핀은 또한 죽은 사람을 명부(冥府)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류도 포유류도 아니면서, 동시에 조류이기도 포유류이기도 한 전설의 동물 그리핀은 불멸을 상징하는 황금의 수호자이자 동

시에 죽음의 사자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그리핀 안에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공존한다.



둘 - 모래더미 역설(Sand-pile paradox)

   군지(郡司) 교수는 ppt자료를 사용해서 모래더미 역설을 강의하고 있다.

   모래더미 역설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전제1) 모래더미는 많은 모래알로 구성되어 있다. 모래알은 모래더미의 부분이다.

   전제2) 모래더미에서 모래알을 하나씩 떼어내도 모래더미는 계속 남아 있다.

   그는 ppt를 작동해서 격자무늬로 도식화한 모래더미에서 모래알을 한 칸 한 칸 제거해나간다.

   그리고 모래더미에서 모래를 한 알 한 알 제거해서 마지막에 한 알의 모래가 남으면 

   그것이 모래알인지 모래더미인지를 묻는다. 부분과 전체는 같아지므로 그것은 역설이다. 

   모래알(부분)과 모래더미(전체)의 공존!



셋- 물고기의 무리 이동과 패싸움

군지교수는 다시 ppt를 넘겨 이번에는 무리 이동하는 물고기 떼를 보여준다.

그는 묻는다. 자유를 담보하면서도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가?

무리 이동하는 물고기들은 수동적 움직임과 능동적 움직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주변의 움직임에 자신의 움직임을 맞추는 것은 수동적 움직임이다.

큰 무리의 움직임은 그와 같은 수동적 움직임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무리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무리를 따르는 움직임 이외에도 

서로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리 사이의 빈곳을 찾아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이때의, 움직임은 능동적 움직임이 된다. 

이렇게 무리 전체를 보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무리 안에는 다양한 움직임이 있다.

다양성을 포함하는 무리(Flock containing diversity)....

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를테면 패싸움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폭 한 무리가 떼 지어 다른 무리와 싸우러 간다.

한 무리가 다른 무리와 맞붙어 싸우는 것은 무리 안에서 수동적인 움직임이 된다.

그러나 무리가 만나서 패싸움을 할 때 각각 일대 일로 붙는 것은 능동적인 움직임이다. 이렇게 능동과 수동은 하나의 구조 안에서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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