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론 - 욕망이라는 이름의 戰車 





 김숙경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특임교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무력해진 그리스 세계를 정복한 것은 당시 그리스 북방에 위치해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마케도니아인은 단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변방의 야만족에 불과한 민족이었습니다만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 왕이 지휘하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 그리스 영토를 수중에 넣고 맙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필리포스 왕은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리스의 패권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당시 약관의 청년이었던 알렉산더는 대단한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해되자 발 빠르게 움직여 암살자는 물론 왕위를 둘러싼 모든 경쟁자들과 그 측근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기선제압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 전역의 소규모 반란들을 진압하여 정세를 안정시킨 뒤 세계 재패를 위한 대장정 길에 오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오랜 숙적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다시 동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일 강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지도상으로 보면 알렉산더가 차지한 영토는 그리스에서 중동, 중앙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일부에 불과한 지역입니다만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상으로 본다면 서유럽과 인도 본토를 제외한 세계 전역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세계 재패의 꿈이 거의 실현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세계 재패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케도니아 고유의 장창(長創) 밀집부대의 위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장창밀집부대란 말 그대로 긴 창을 가진 병사(보병)들이 밀집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보통 창의 두 배 길이(5.5m)가 되는 창을 두 손에 잡은 병사들이 빽빽하게 방진(方 진)을 이루고 대적시 수직으로 세워들었던 장창을 수평으로 겨누면서 적군의 근접을 막습니다. 이 전법은 특히 기마부대의 대적에 효력을 발휘하여 돌진하던 말들이 갑자기 수평으로 달려드는 장창에 놀라 좌충우돌하며 전열을 어지럽히는 사이 다른 부대들은 측면 공격을 가해 당황한 적군을 포위하는 전법을 구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예의 장창부대를 거느린 알렉산더의 군대는 가히 천하무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승전고를 높이 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정길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던 ‘승리의 전차’는 인더스 강 가에 이르러 그만 우뚝 멈추고 마는데 기나긴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알렉산더의 병사들이 가공할 인도의 코끼리 군단을 맞아 세계 재패의 마지막 관문인 인도 정벌을 코 앞에 둔 채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빠른 전투용 코끼리들 앞에서는 장창부대의 위력도 소용없이 낙엽처럼 던져지고 짓밟히며 쓰러져갔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온 몸을 던져 싸우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알렉산더는 분퇴하여 페르시아의 바빌론에 입성한 뒤 그 역시 의문의 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 마케도니아를 떠난지 1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크게 엇갈립니다.
세계화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은 희대의 영웅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이자 동서 문명의 교류자라는 호평과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숙적들, 심지어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까지 살해하고 정복지의 주민들을 무수히 학살했던 무자비한 권력자라는 악평등, 극단적인 해석과 평판이 난무합니다. 더욱이 그의 행적을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더해져 그 편차의 증폭을 더해주고 있는데 그 복잡한 역사의 미궁 속을 잠깐 들여다보자면 이렇습니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그리스 북서부의 작은 왕국 몰로디아의 왕녀 올림피아스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필리포스의 선조는 그리스 신화 속의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였다고 하며 올림피아스 역시 트로이의 장사 아킬레우스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역사의 시작은 신화에서 비롯되니 그 진위여부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일이 되겠지요.
제우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는 밀의종교(密敎)의 신봉자로 자신이 제우스신과 교접하여 알렉산더를 낳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정도로 신비적인 색채가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라나는 알렉산더에게 늘 그가 제우스의 아들임을 주지시켰으며 알렉산더 역시 훗날 그의 어머니처럼 밀교에 심취되어 자신이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신과 같은 존재로써 백성들로부터 추앙받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를 신으로 섬기는 행위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태생부터가 수수께끼에 싸여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필리포스왕이 그를 경호하던 근위대원에게 암살당하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보낸 첩자의 소행이라는 설과 한 때 필리포스의 동성애인이었다가 버림받은 경호원의 단독 범행이라는 다분히 정략적인 설들 이외에도 항간에는 왕비 올림피아스의 사주설(使嗾說)이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그만큼 올림피아스는 권력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다른 왕비가 낳은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 저능아로 만든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편 필리포스가 죽자 당시 알렉산더의 가장 큰 경쟁자로 떠올랐던 후비의 어린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후비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훗날 알렉산더가 요절하자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다가 그녀 역시 반대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올림피아스의 사주설에 가장 많은 표를 던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녀로서는 왕이 총애하던 후비의 아들이 성장하기 전에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왕위에 올려놓아야만 안심이 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설득력 있게 작용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알렉산더가 부왕 암살의 주범이거나 적어도 공모자라는 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요?
근년에 만들어진 올리버 스톤의 영화 ‘알렉산더’를 보면 그가 부왕의 암살범이 아님을 확실히 드러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알렉산더가 안고 있는 내면의 고독과 외로움 등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연민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프로이트적 접근을 통해 부모에 대한 애증을 한 몸에 안은 채 끝없이 갈등하고 방황하고 고독해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알렉산더의 내면 심리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이와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냉혹하고 비정한 면모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왕 암살과 관련된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기록이 있어 알렉산더의 직접 개입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일면이 있습니다. 그 혐의점을 살펴보자면 우선 부왕이 총애하던 후비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서 알렉산더의 왕위 계승이 불안해졌다는 것, 그 당시 부왕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 왕이 살해되자 그것을 구실 삼아 왕위 경쟁자들과 자신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혐의점은 암살범을 체포하여 심문하거나 재판에 부쳐 범죄의 실체를 밝히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부왕 암살설을 지지하는 측은 이와같은 알렉산더의 행위를 증거인멸을 위한 방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 올리버 스톤은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사주임을 눈치 챈 알렉산더가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서 암살범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만 .....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이처럼 사건의 전모는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하긴 화성 연쇄 살인범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판국인데 2천3백 년 전의 살인사건을 오늘날의 인간들이 무슨 수로 밝혀내겠습니까마는.....
이런 경우 떠오르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독일의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입니다.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두고 말 할 수 있는 부분만을 언급하는 편이 훨씬 실속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우리가 여기서 건질 수 있는 소득은 암살의 주범이 누구였던 간에 부왕의 암살 사건은 알렉산더에게 백퍼센트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렉산더는 확실히 왕권을 거머쥘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나의 의문점을 애써 잠재우고 나니 또 하나의 의문점이 불쑥 고개를 쳐듭니다. 왜? 알렉산더는 그토록 세계 정복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그토록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Why?
단순히 전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싶은 그의 야망 때문이었을까?
그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그로 하여금 끝없이 싸우고 또 싸우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어떤 모습을 혹은 어떤 상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간절히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더욱 집요하게 따라붙었을, 그림자 같은 그 무엇 때문에 어디엔가 광적으로 집착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패배 혹은 배신에 대한 두려움?
암살과 죽음에 대한 공포?
아니면 모종의 죄의식?
그도저도 아니면 보다 원초적인 오이디푸스적 외로움? 혹자는 그를 심각한 전쟁 중독증 환자로 진단하기도 합니다. 전쟁도 도박이나 마약이나 그밖에 여타 쾌락 추구의 행위들처럼 중독성이 있다는 것인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장기나 바둑에 심취하듯이 아니면 컴퓨터 게임 ‘바람의 나라’에 빠져들 듯이 그는 실전 게임에 흠뻑 빠져들어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투에 임하면 늘 선봉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움에 몰두했다는 기록은 이 같은 전쟁 중독설에 한 층 신빙성을 더해주는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그의 원정에는 동서융합을 이루려는 보다 원대한 계획이 깔려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동서 문화의 융합을 꾀했다는 것은 사료 상으로도 명백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는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 식 도시를 건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 뜬 ‘알렉산드리아’ 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집트의 수도처럼 오늘날까지도 그 명칭이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의 바빌론 성에 머물며 그 곳 여인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 곳의 제도와 복식 등 동방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처럼 이민족들을 바바리안으로 치부하여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그가 페르시아의 왕을 자처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최상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민주주의 보다 동방의 전제 군주제라는 시스템이 간절히 요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한없이 격하되어 토인비가 칭송해마지않던 드높은 이상이나 고귀한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다못해 올리버 스톤의 오이디푸스적 연민마저 허용되지 않는 단테의 지옥에나 떨어질 (실제로 단테는 신곡의 지옥 편에 알렉산더를 배치합니다) 파렴치한 전쟁광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겠지요.
늘 그렇듯이 모든 역사에는 구멍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무수한 추측과 해석과 나아가 픽션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역사 학자 E.H 카아는 ‘역사란 사실을 근거로 쓰는 소설이다.’ 라고 말했을까요.
여기에 보잘 것 없는 제 의견이 보태져 또 하나의 허접스러운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저의 관심사는 방향을 크게 틀어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이후 전개 될 동서 문화의 융합과 그에 따른 예술의 변천사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전개될 헬레니즘 예술을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내내 웬지 무겁고 착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난 뒤의 홀가분함.....
역사의 늪에 그물을 던지면 온갖 질퍽한 것들이 한데 뒤엉킨 채 끌려 올라옵니다.
그 묵직하고 지저분한 그물을 맑은 물에 담구고 흔들어 주면 정치, 권력, 욕망, 전쟁, 음모, 저항, 반역, 처벌, 혁명, 투쟁..... 이 모든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들이 다 씻겨내려가버리고 마침내 남는 것이 있습니다. 사금처럼 가볍고 빛나고 아름다운 것..... 바로 예술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그야말로 죽기까지 달리는 알렉산더의 戰車와 닮은 또 하나의 전차를 문득문득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습니다.
'멈추면 죽는다. 쉬지 말고 달려라.' 바로 욕망의 레일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電車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시대로부터 이 광란의 열차를 이야기하기까지 인류가 가야할 길은 멀고도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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